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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지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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004. 와인


와인

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술을 거의 못한다.
와인은 2시간에 한 잔 정도 마실 수 있고(디캔터가 필요없고나)
친구와 술 마시러 가자! 이렇게 되면
우리는 삽겹살 항정살 갈매기살을 굽고
친구는 청하
나는 소주잔에 사이다 그리고 청하 두..방울?
그럼 거나하지 거나해 후하하하

아 갑자기 잠시 딴 얘기
술 안 마신다면 '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요'라고 하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
그럼 당신은 술 외엔 재미가 없단 말입니까......

다시 돌아와서,
그런 내가 요즘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번역이 딱 하나 있는데
(민음사 세미콜론의 만화들 말고)
바로 모 멤버쉽잡지의 와인 기사의 번역.
음악일이 바빠지면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번역 일을 다 끊었었는데
그 잡지는 편집장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와
'지은씨가 아니면 안되요'하고 은근히 말씀하시는 바람에
그런 말에 몹시 약한 나는 그만 '예...그렇다면 제가 합죠'하고 넙죽.
그런고로 와인은 쥐뿔, 술을 못 마시는 내가 와인 기사를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.
(물론 분량과 수고에 비해 수고비가 짭쪼롬하다는 장점도 있다! 예이!)

이제는 제법 이름도 안다. 나원참.

그런데 이번달 원고 중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.
주제는 [와인을 가장 마시기 적당한 때는 언제인가?] 였는데
유명한(듯보이는) 와인 평론가 로버트 마이클 파커 쥬니어가 이렇게 말했다지.
[당신이 코르크를 열었을 때가 와인을 마시기 가장 좋은 때 입니다]
호오 그렇군. 하긴.
하고 당시엔 넘어가고, 원고를 넘기고
오늘 왠지 기분이 좋아서 삼성역에서 집까지 걸어가고 있는데
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.

'인연 또한 그렇지가 않은가!'
음, 매사를 연애로 해석하는 나답다.

연애라는 게 모두가 알다시피 나와 상대방, 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
내 사정, 상대 사정, 내 인격 성숙도, 상대방 인격 성숙도, 제일 중요한 애정은 물론 각종 변수까지
갖가지 요인이 변수로 작용을 한다. 그리고 대부분의 연애는 실패로 끝나지.

와인에는 산이 들어있다면서. 그래서 그 산이 천천히 시간이 감에 따라 변하면서
와인의 복잡 미묘한 맛이 생겨난다면서.
그래서 같은 와인인데 오늘 먹는거랑 1년 뒤에 먹는거랑 맛이 다르다면서.
(100% 전해들은 얘기이니 말투가 '면서'로 끝날 수 밖에 없음)

오늘 맛 없던 와인, 작년에 먹었더라면 맛있었을텐데,
또는 1년 뒤에 먹을 수 있었다면
또는 10년 뒤에 먹을 수 있었다면

...하고 후회해봐야 소용없다. 그 와인을 마시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이
병 코르크를 따기 전에 모르고
나중에 다시 마셔보지 않으면 모르고
그리고 사람의 미각이라는게 또 얼마나 상대적인가.
결국 코르크를 딴 '지금'만이 중요하다는 것.
맛의 피크포인트를 알 수 없는 이 와인이 지금 내 손에 들려있으니까.

어떤 사람을 예전에 만났다면, 아니면 나중에 만날 수 있다면
내가 이런 상태가 아닐 때 만났다면
...하고 생각해봐야 소용없다. 우리에게 타임머신이 없으니까
(불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. 그러니 인생이지)
그리고 실패로 끝난 인연이라고 그 인연이 소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.

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. (..고 원고에 써있었다)
[비운 와인을 후회하지 않는다]
코르크를 따서 콸콸 부어서 신나게 마셨으면
'에이...마시지 말껄'뭐 이런 생각 하는거 아니고
인연이 시작되어 병을 비웠다면,
그 또한 후회하는 거 아니고

비운 와인을 후회하지 않고,
지나간 인연을 후회하지 않고
한 술 더 떠,
지금 나에게 가장 맛있을 와인은
...지금 내 글라스 안에 담겨있는 와인이라는 것!



아. 그리고 이제
이탈리아산 스파클링 와인은 좀 마실 수 있게 되었다.
두잔정도는?!



  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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